Page 77 - 대건고 2022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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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촬영에 투입되니 감독의 본업인 연출에 대한 부분에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촬영 현
장에서의 연출은 시나리오의 상황을 충분히 묘사하는 동시에 현장의 상황에 맞게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시나리오의 내용에만 몰두한다면 상황에 맞지 않게 대사가
어색해지거나 인물의 동선이 부자연스러워지곤 한다. 카메라로 비춰지는 영역을 ‘진짜’라고
인식하고 실제라면 인물이 저렇게 행동할까를 많이 고민했다. 대안이 떠올랐다면 디렉팅을 할
차례였다. 모든 인원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촬영 현장에서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
두가 알고 있어야 한다. 감독이 원하는 바를 감독 혼자만 알고 있다면 진행이 두서없게 된다. 혼
란을 방지하기 위해 공동 연출자인 하빈이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정리하여 조리 있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연기에 대한 디렉팅에 대해선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배우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도록 지
시한다면 배우는 감독의 요구사항을 수행하느라 연기가 그 속에 갇히고 말았다. 본격적인 촬영
에 들어가기 전 가진 실습 시간에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주인공을 맡은 병국이에게 슬픔
을 요구하면 한없이 슬퍼지기만 했고 짜증을 요구하면 맥락 없이 짜증만 냈다. 그러나 이는 배
우의 잘못이 아니었다. 실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병국이가 내 디렉팅에 대해 한 가지 부탁
을 했다.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요구하기보다는 최대한 배우의 자율에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지시사항을 수행하려다 보니 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 말을 명심하고 촬영에 임한
나는 연기에 대해 지시하기보단 배우에게 상황을 이해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결과적
으로 병국이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병국이만의 영식이었다.
촬영이라는 작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실 영화는 촬영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 단지 감독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감독은 자기 영화의 첫 번째 관객
이자 유일한 관객이 되어 홀로 관람하고 웃거나 울고 그런다. 감독 혼자만 공감하고 마는 영화
는 의미가 없다. 영화가 영화다워지기 위해선 먼저 감독의 머릿속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시
나리오를 쓰고 영화화의 절차를 밟는다. 영화의 형태가 무형의 아이디어에서 글로, 영상으로
점점 구체화 될수록 공감의 범위는 확대되고 생명력은 더해진다. 촬영은 이러한 과정 중에서도
가장 대대적인 작업인 것이다. 내용뿐이던 영화의 형식을 완성하는 과정, 촬영 때마다 입었던
옷을 빨았어야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다시 경험해보고픈 고생이다.
2022 Daegun High School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