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대건고 2022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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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쓰기가 상상하기의 과정이라면 영화 촬영은 실현하기의 과정이다. 마치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과정과 비슷하다. 꿈은 마음껏 꿀 수 있다. 노트북에서 타자 좀 두드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촬영 때는 자신이 써 놓은 시나리오에 펼쳐진 상상의 나래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순간
이 온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에 ‘주인공이 탄 우주선이 서서히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다.’라는 대목이 있다면 촬영 땐 소품이나 CG를 동원해 이 장면을 구성해야 한다. 이렇듯 영화
촬영 도중 발생하는 문제들의 대부분은 상상을 어떻게 현실화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경
우엔 ‘거울 조각이 맞춰지자 영식의 결연한 눈빛이 비춰진다 .’조차도 쉽사리 찍지 못하고 쩔쩔
맸다.
영식이가 발굴을 준비하면서 유물 복원을 나름 연습해보겠다고 거울을 깨고 다시 맞춰보는
장면이 있다. 이때 조각들이 맞춰지는 순간에 영식의 결연한 눈빛이 거울 위로 나타났으면 했
었다. 거울을 깰 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거울이 너무 잘게 쪼개져서 모래알 같은 조각들 위로는
선명한 상이 맺히지 못했다. 방편으로 가장 큰 조각을 찾아 그 위로 영식의 얼굴을 이리저리 대
보았다. 영식이 이런저런 기형적인 포즈를 취한 끝에 영식의 얼굴이 나타났고 우린 그 자세를
유지시키며 하나의 컷을 어렵사리 얻어냈다.
꿈두레 수업 중에는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만약 촬영 때...”등의 서두로 시작된 대화가 끊
임없이 이어지며 촬영에 대비한다. 하나의 장면에 들어가는 모든 부분을 준비해야 했다. 장소와
배우를 섭외하고 소품을 준비하고 낮이나 밤이 필요하다면 장면의 촬영 시간대를 옮긴다. (PD
의 수고가 정말 많다) 날씨는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기도를 드렸다. 그럼에도 막
상 촬영에 임하게 되면 미처 준비하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고 불가항력적인 상황도 생긴다.
특히 '금 따는 콩밭'의 주요 무대가 되는 산에서의 촬영은 예상치 못한 변수들의 연속이었다.
유물 발굴 현장을 재현하려면 깊은 구덩이들이 필요했기에 우리의 촬영을 도와준 '미상불' 친구
들은 미리 산에 올라 열심히 땅을 파줬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산 전체가 돌덩이였다. 얇게 덮인
흙을 파내고 나면 더 이상 파고 내려갈 곳이 없었다. 결국 촬영에 쓸만한 구덩이는 만들지 못했
다. 산에서는 해도 빨리 지기 때문에 7시 즈음 되자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져 우리 모두 스마트
폰 후레쉬를 비춰가며 배우들을 밝혀줘야 했다. 촬영 장비들을 한가득 들고 산을 오르내릴 때,
모기약을 뿌리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PD를 보고 있을 때 촬영은 노동이었음을 깨달았다.
76 2022 63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