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대건고 2022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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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를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최명길을 긍정하오. 이건
               김상헌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오”. 본인 역시 최명길의 주장에 좀 더 동의하는 것은 사실이지
               만, 김상헌의 주장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살고자 한다.”라는 구절은
               둘의 논쟁을 지켜보던 인조의 대답이다. 그는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임금이
               되려 한다. 가장 비루한 자가 되려 한다. 종묘사직을 등에 업고 삼전도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인
               조의 모습이 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김훈 작가는 역사 속의 장면에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불어넣음으로써 이야기를 훌륭히 전달한다.


                 문학으로서의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훌륭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가지는 가장 큰 훌륭한 점은 바로 담담한 문체이다.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사건 중 하나이지만, 이를 미화하려는 시도
               는 이 소설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무능한 조정, 그들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 조선이 당하는
               치욕을 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이야기의 전달력을 배가시키고 독자들의 정서
               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소설 남한산성의 요점은 무엇일까, 조선에 주어진 삶의 길? 명
               분이냐 실리냐에 관한 사대부들의 논쟁? 물론 이것들도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소재이
               다. 하지만 이들만이 요점이라면 의문점이 생긴다. 이들은 역사책에서도 다룰 수 있는 소재들
               이다. 김훈 작가는 흔히 이루어지는 역사적 논쟁과는 다르게 역사 속 장면에서 시시비비를 따
               지거나 치욕, 명예 같은 것들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한산성’만이 가지는 문학적 차별
               점은 다른 곳에 있다. 의 요점은 결국 ‘남겨진 백성들의 삶’이라고 소설은 단순히 대신들과 임
               금, 청과 조선의 갈등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백성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서날
               쇠’라는 캐릭터를 이용해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도 내비친다. 비극적인 항복 이후에도 남
               한산성에 봄이 오는 것을 계속해서 묘사한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남한산성의 토양
               에는 싹이 올라온다. 생명의 징조가 피어난다. 꽁꽁 얼었던 강도 다시 흐른다. 남겨진 백성들은
               봄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봄이 온 남한산성으로 돌아온 서날쇠와 그 가족
               이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는 장면이다. 비록 나라가 굴복했다 할지라도 민중은 그 삶을 이어간
               다는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역사는 굴러가는 수레바퀴
                 역사는 굴러가는 수레바퀴라는 말이 있다. 지난 일은 훗날 다시 만나게 되는 법이다. 이 치욕
               스러운 역사 역시 언젠가 우리의 눈앞에 다시 펼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망
               각하고, 과거를 뒤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기 위해서 우리 역
               사 속 가장 비참한 장면을 끄집어내 소설로 승화시킨 것 같다. ‘남한산성’은 대단한 형태의 소설
               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소설은 하나의 큰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이야기이다. 줄기에서 가지
               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뿌리에서부터 온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이 공
               유할 수 있는 이야기, 역사를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어떤 형식이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소설처럼 뿌리에서부터 오는 글, 본질을 꿰뚫어 많은 사람
               이 공유하고 공감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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